제 목:『원더풀 데이즈』를 보고. (『Wonderful Days』 기자시사회 참석후기)
보낸이:선정우 (mirugi ) 2003-07-05 01:50 조회:1955
이 글 안에서는 일단, 스포일러성 내용은 적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습
니다…… 라고 쓰려고 했으나, 도대체 이 영화 안에 스포일러되어서 곤란
한 내용이 있는지를 5분 동안 잘 고민해봤으나,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
서 그냥 쓰기로 하겠습니다.
혹시 그래도 미리 내용을 아는 것을 꺼리는 분이시라면, 딱 한마디만 먼저
하죠.
당신이 1년에 3편 이상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망할 작품인데 한
명쯤 더 봐주는 걸로 한국 애니메이션에 그나마 희망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
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7000원 (혹은 할인되어서 더 싸게 볼 수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고)쯤은 솔직히 엥겔계수에까지는 대세에 지장 없으신 사람
이라면, 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저는 위에 전부 해당되었고, 오늘은 시사회에서 봤기 때문에 돈은 안 들었
기에, 개봉 후에 할인가로 예매해서 한 번쯤은 더 봐줄까 하는 생각도 하
고 있군요.
다시 봐야만 할 뭔가가 이 작품 안에 있다는 건 물론 아니고 ;;, 그냥……
굳이 말하자면 음악이나 다시 들어볼까 하고. ;;
(첫 감상시에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어색한 사람들이 꽤 많아서 배경 음악에
몰입이 잘 안되었음. 물론 어차피 OST 살 거니까 따로 음악만 들어도 되겠
지만, 영화음악은 되도록 화면과 함께 보고 싶어하는 주의라서…….)
자, 그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원더풀 데이즈』. 가보겠습니다.
내용이야 대략 신문 잡지 등에서 보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니까 배경
은 2142년. (왜 굳이 2141년도 2143년도 3142년도 아닌 2142년인지에 대해
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염물질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에코반이라는 도시와, 그 주변의 마르
라는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곳, 미래의 오염된 지구가 배경입니다.
에너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설한 에코반은,
그 오염을 자원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애초에 환경문제 얘기 나오면 솔직히 한국 애니
메이션에서조차도 10년 전에나 유행하던 테마고, 뭐 10년 가까이 전에 기
획된 작품이 이제야 제작된 것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하여튼간에 이 작품
에서 설정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유전에 불을 질러 오염을 더 확산시키겠다는데, 솔직히 저도 보면서 "불지
를 유전이 있으면 그걸 그대로 에너지원으로 쓰면 되지 않나" 생각 들었지
만, 뭐 헐리웃 블럭버스터 영화들에도 그런 애매한 설정은 자주 볼 수 있
고요.
그런 세세한 설정 미스보다도, 애시당초 도대체 왜 이런 설정을 기획하려
했는지부터가 저로서는 이해가지 않는 것이니까, 오히려 그런 사소한 부분
은 처음부터 무시하고 화면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 문제 또 얘기 나오는데, 상황적 논리와 설득력 부족은 많
이 봐줘서 "영화에도 그런 경우 자주 보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도 잘
생각해보면 그런 경우 많지"라고 넘어가줄 수는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정말 많이 봐줘서. ;;
뭐,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쉬리』의 스토리가 논리나 설득력이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조폭 마누라』는 무슨 엄청난 스토리가 있어
서 흥행한 것은 분명히 아니죠.
……다만, 그 영화들은 처음부터 『원더풀 데이즈』처럼 뭐 엄청난 스토리
만들 것처럼 노자니 이상과 현실과 에로스니 떠들고 있지 않다는, 그래서
애초부터 '블럭버스터'나 '상업 영화'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는 최대의 장점
이 있고, 『원더풀 데이즈』는 쓸데없이 뭔 엄청난 예술적 대작을 만들 듯
이 호령하다가 기대만 못하니까 점수를 깎인 것이겠습니다.
캐릭터는……, 이런 캐릭터들에 몰입될 관객이 과연 있을지는 매우 의심되
긴 합니다. 별로 귀엽지 않은 여주인공의 기껏 나오는 샤워 신에서는 어깨
이하로도 내려가지 않고, 잘 때에는 왜 속옷 차림이 되어야만 하는지 모르
겠지만 아무튼…….
게다가 어린 시절 잠깐 사이가 좋았던 것 뿐인데, 몇 년동안이나 못만나다
가 갑자기 다시 만나서 3각 관계가 부활한다는 줄거리는, 사실 일본 만화
에서도 자주 보는 내용이긴 한데, ……그런 경우가 정말로 있을 수 있는지
좀 의문입니다.
……근데 그런 얘길 했더니, 같이 보신 분이 "실제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더라. 아이러브스쿨 초등학교 동창회 때문에 깨진 부부가 많다지 않느냐"
라고 해서, 나름대로 납득해 버렸습니다. -_-
아무튼 이야기를 다시 돌려서, 어쨌거나 설정 부실하고 스토리 이해가 안
가고 캐릭터 몰입이 안됩니다. 성우 연기도 어쩐지 어색해서 (특히 주인공
들이), 그나마 마음에 상당히 드는 배경 음악에서 자꾸 귀가 떠나게 만들
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이 작품의 '눈부신 기술적 성과'라는 언론의 칭찬은 정말 농담이
아닙니다.
어느 한 곳 흠잡기 힘든 화려한 작화, 『타이탄 A.E.』 따위(!)와는 정말
비교되는 2D와 3D의 충분한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문생 감독이 CF
감독 출신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듯한 화면 구성력과 움직임의 연출력은 발
군입니다. 움직임과 카메라 워킹에 있어서는,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수준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일본에 갖고 가도,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겠더군요.
메카닉 등의 3D는 물론 CG라는 티가 납니다만, 그 정도도 티가 안 나기는
사실 힘들죠. 풀CG 영화도 아닌데.
기술적으로는, 『메트로폴리스』에 버금간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까지 말
해줘도, 약간 팔이 안으로 굽는 점은 있다손 치더라도, 뭐 충분히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트로폴리스』에 비교해서 떨어지는 점은 캐릭터 표현 정도고, 솔직히
저는 『메트로폴리스』의 작품 완성도를 그다지 높게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원더풀 데이즈』의 전체 점수를 굳이 매겨야 한다면 딱 '『메
트로폴리스』보다는 낫다'고는 말해주고 싶군요.
……다만, 다시 언급하지만 전 『메트로폴리스』를 별로 수준작으로는 생
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토리도 무슨 내용인지 알기도 힘들고 별로 알고
싶어지지도 않고, 캐릭터들도 조형적으로는 『원더풀 데이즈』 캐릭터들보
다야 (당연히) 낫지만 영 몰입이 안되고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고, 『메트
로폴리스』에 대한 제 평가라야 그 정도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설정이나 스토리 자체의 중량감은 『메트로폴리스』쪽이
아무래도 낫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원더풀 데이즈』가 너무 안이
한 소재를 설정으로 차용했고 도대체 논리가 안 맞는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
기 때문이지, 별로 『메트로폴리스』의 장점이라고는 하기 힘들다는, 굳
이 『원더풀 데이즈』와 『메트로폴리스』를 제가 비교한다면 그런 정도입
니다.
왜 굳이 『메트로폴리스』를 자꾸 예로 드는가 하면, 일단 이 작품을, 한
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이 배경음악만 깔고서 본다고 한다면, 솔직히 말해서
『원더풀 데이즈』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화면'발'이 너무 멋지게 서는군요.
문제는 '시나리오가 비주얼에 비해 약하다'는 평가에 대해, "드라마는 문
학을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지만, 영화는 시각과 청각으로 전달하는
미장센의 예술"이라고까지 했던 김문생 감독의 말과는 달리,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이미지만 나열하면 그게 미장센인가?"라는 질문이 절로 나올 정
도로, 화면'발'만 세웠지 도대체가 작품과는 연결이 안된다는 점이 문제랄
까요.
이에 대해 감독에게는, "영화는 CF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김문생 감독은 "스토리상으로 불친절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헐리웃
같이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는데, ……불친절
은 뭐가 불친절하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 스토리 보고 이해 못할 관객이 있다면, 그건 무슨 노자의 사상 같은 거
창한 무언가가 숨어 있는 스토리를, '헐리웃 영화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
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스토리에 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자주 봐서 영화적 스토리 전개법에 익숙한 관객에겐,
오히려 이 작품은 '스토리상 불친절'이 아니라 너무나도 진부함을 넘어서서
이젠 한바퀴 돌아 신선하기까지 할 정도의 '뻔할 뻔자'가 반복되는 스토리
에, 오히려 유쾌할 정도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수백 수천 년 전쯤에는 작품 끝나면 악당은 회개하고 주인
공들은 잘먹고 잘살았습니다. 때로는 악당을 없애고 잘먹고 잘살기도 하고
요. 그러다가 '비극'이 나오면서 주인공이 죽기도 합니다. 『로미오와 줄
리엣』처럼 히어로와 히로인이 둘 다 죽기도 했죠.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잘먹고 잘살기도 하고, 그게 좀 진
부해지니까 주인공들이 다 죽기도 하고, 그것도 좀 진부하니까 생애의 라
이벌인 악역과 함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되기도 합니다.
……거기에서 한 바퀴 돌아오면, 다시금 악당은 죽고 주인공들은 잘먹고
잘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라고 해도, 『원더풀 데이즈』에서 주인공들이 그 뒤에 잘먹고 잘살았는
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 -_-)
아무튼 김문생 감독은 "『원더풀 데이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특정한 스
타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는데, 약간 제가 그 말을 보충하자면,
"『원더풀 데이즈』는 진부한 이야기를 특정한 스타일로 표현한 작품"이라
고 생각합니다. -_-
이젠 세부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냥 떠오르는대로 적습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 어덜트(Young Adult) 세대는 극적 재미를 만끽할 수
도 있을 것 같다"라고 했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영 어덜트' 세
대는, 『원더풀 데이즈』 정도의 극적 진행에서 재미를 느끼지는 않으리라
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여기에 뭔 극적 재미를 넣았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냥 붙인 수사인가요? 해외에서는 "아름다운 스토리"라고 했
다는데, 뭐 하긴 아름답긴 합니다. 아름답죠. 제가 너무 세파에 찌들어
서 아름다운 걸 그냥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
해주고 싶습니다. -_-
슬쩍슬쩍 한국적 요소 많이 들어간 건 좋다고 봅니다. 무슨 『블루 시걸』
의 보검이니 불상이 나와서 헛소리 하는 것과는 달리, 하회탈이라든가 암
호로 한글 풀어쓰기 살짝 보여주는 정도는, 너무 작위적인 냄새도 별로 안
나고 딱 좋은 듯 합니다.
일본 만화들에서 일본적 요소를 슬쩍 집어넣듯이, 그냥 적당히 곳곳에 배
치한 정도로 느껴져서 큰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고 봅니다.
성우들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글쎄요. 딱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분
명히 PC통신 동호회와 인터넷 게시판들에는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나올 것이
라는 점입니다. ;; 분명히 이거 웃긴다, 왜 이 모양이냐, 바꿔라, 하실
분들 있을 겁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해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작품 마지막 장면에서 『자이언트 로보』 OVA 마지막편이 떠오르기도 하더
군요. 거기에서 긴레이가 들고 있던 프랑켄 폰 포그라 박사가 만든 샘플이
담긴 캡슐, 그것과 비슷한 캡슐(?)을 주인공이 꽂으려다가 총에 맞아 떨어
뜨리는 장면…….
그리고 막판에 결국 대기의 오염을 정화시키게 되는 장면은 시즈마 드라이
브의 사용으로 인한 지구 대기의 문제를 중화시키는 마지막 부분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뭐 그러나 영향이라고 할 것까지도 별로 없고, 이 정도의 썰렁한 설정이야
굳이 『자이언트 로보』까지 갈 것도 없이 널리고 쌓여 있으니 별로 뭐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여주인공 제이는, 남주인공 수하가 남긴 종이비행기 안의 메시지를
어떻게 읽을 수 있는 건지 조금 이해가 안 갑니다. ……여러분은 보통 종
이비행기가 눈 앞에 떨어져 있으면, 그걸 펼쳐서 안에 뭐가 써있는지 보시
는 편이십니까? ;; 뭐 이건, 2142년의 풍습이라고 이해를 해두죠. -_-
어린 시절의 수하와 제이. 수하가 날린 종이비행기는 너무 멀리, 너무 높
이 날아갑니다! ……뭐 이것도, 마침 그때 바람이 잘 불어줬나 보죠. 그
렇게 그냥 봐주기로 합시다. ;;
영화 맨 마지막 장면, 수하가 에코반에 침입하기 위해 타고 온 글라이더가
바다에 떨어져 있다가, 바람에 휘날려 공중으로 부양합니다. 그리고 높이
높이 날아갑니다. 아주 높이……, 심지어 우리가 그동안 몇 년 동안 보아
왔던 『원더풀 데이즈』의 바로 그 유명한 포스터의 그 장면!
……아니 그 장면을 만들기 위해, 바람 좀 분 것 정도로 이미 파도에 휩쓸
리고 있는 떨어진 글라이더를 공중에 띄운단 말인가! ;; 어떻게 뜬단 말이
냐!
……라고 해도 뭐, 뜰 수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기도 하죠. 그 정도는 뭐
'미장센'을 위해 봐주기로 합시다.
제이의 샤워 장면에서 갑자기 샤워실 바닥의 물 빠지는 배수구를 비추는 연
출도, 영화부터 애니메이션까지 지겹게 봐온 컷이라 짜증이 좀 났습니다만
별로 그렇다고 그게 문제랄 것까진 없으니까. ;;
하모니카는 왜 부는지, 눈 먼 여자애는 나와서 도대체 뭘 한 건지, 어린
시절의 제이는 푸른 하늘 한 번 보여줬다고 남자애한테 왜 뽀뽀를 해주는
건지, 삼각관계의 한 축인 경비대장 시몬은 뒷머리를 묶고 있는데 어린 시
절부터 똑같았단 말인가! 마르의 레지스탕스인지 뭔지의 일원으로서 에코
반 공격에 참여했던 앞머리 긴 놈은, 몇 년전부터 지겹게 보던 예고편에서
부터도 『중전기 엘가임』의 미라우 캬오를 연상케 했는데 여전히 연상이
되더라. (상관없지만. ;;)
중간에 에코반의 경비대가 쳐들어올 때, 수하가 마침 깰 수 있게 만들어준
꿈 장면이 너무 길다! 4월에 개봉하려 했을 때 러닝타임 95분이었던 것을
87분으로 8분 줄였다는데, 그게 중간에 잠깐 등장하는 반라 무희의 춤 장
면이라고 합니다만, 그 부분도 잘 줄였다고 보지만 (이건 제가 반라의 무
희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점도 있긴 한데, 실제 드라마상으로도 그게 더
길었다면 『블루 시걸』이 되었을 뻔 했다고 봄) 꿈 장면도 좀 더 줄였어야
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행'에 집착을 한다면 김문생 감독은 오토바이 질주에
상당히 집착을 하는 듯 하는데, 중간에 잠깐 나오다 만 비행 장면이 지겹
게 반복되는 오토바이 질주보다 백배 낫더라! -_-
오토바이 질주는 몇년 전의 예고편에서부터 지겹게 질주하던데, 본편에서
도 시작할 때 자막 나오면서부터 질주하더니 (자막 부분에서 오토바이 나오
는 것도 왠지 『블루 시걸』이 연상됨. -_- 앞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감독
들은 제발 좀 시작할 때 오토바이 그만 등장시켰으면 좋겠음. 『AKIRA』에
대한 트라우마인가? -_-), 질주하고 또 질주하고, 정말 지겹게 질주함!
오프닝 타이틀 나오기 전의 스태프 롤은 아주 멋짐. 요즘 한국영화 스태프
롤들이 꽤 괜찮고, 제목 폰트들도 상당히 신경 써서 만드는 편이라서 별달
리 튀지는 못하는데, 과거 그 어떤 한국 애니메이션들보다도 수준급임.
(라고 해도, 『오세암』도 스태프롤 부분 꽤 괜찮았음.)
'연출 누구누구'하는 글자가 딱 뜨면서 사라져가는 모양이 꽤 멋짐. 시작
하자마자 신경 써서 볼 것.
또 스태프롤 마지막에 '감독 김문생'이, 오토바이 질주가 (드디어!) 끝나
면서 올라가는 길 묘사의 가운데에서 딱 뜨는데, 이 부분도 아주 좋았음.
이런 세세한 부분은 확실히 CF감독 티가 난달까. '잔재주'가 너무나도 뛰
어나다고 평가하고 싶음. 확실히 지금까지의 한국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런
저런 '잔재주'까지 신경을 못쓸 정도로, 너무 전체적으로 썰렁한 점이 많
았는데, 돈이 남아돌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 『원더풀 데이즈
』에는 전체적으로 너무 여유가 넘쳐 흐름. ;;
잔재주 만발! 화면 주시 필요!
막판에 무중력 상태처럼 되면서 피가 떠오르는 장면 같은 것도 아주 독특하
고 괜찮았습니다. ……근데 거기에서 '수영'을 해서 분위기 깨더군요. -_-
무중력 상태에서 수영이 된단 말인가! ;;
……같이 보신 분 중에는 "혹시 에너지가 충만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닌가"하
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시기도 했지만 아무튼간에, '무중력 or 에
너지속 수영'이라는 새로운 스포츠 장르에 대해 고민을 해보게 만드는 부분
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코반의 원로원(?) 회의, ……바닥 밑으로 사라지는 의자라는
것은 1970년대 TV 애니메이션이냐! ;; 제발 좀 바닥은 그만 둬! 바닥은!
아무리 미래가 되더라도, 그냥 일어나서 걸어가면 되지 구태여 의자가 바
닥으로 꺼지게 될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되지 않아! ;;
(……어쩌면, 이 바닥으로 꺼지는 의자가 너무 SF에서 강조된 관계로, 진
짜 지금보다 더 미래가 되면 '무언가 중요한 인물들의 회의실 의자는 바닥
으로 꺼지기 마련'이란 것이 상식이 되어, 정말 바닥으로 꺼지는 의자 시
스템이 구축될지도 모르겠지만. -_-)
……등등.
그럼 이쯤에서 결론.
기획을 포함한 제작기간 7년. 제작비 126억원이라는 엄청난 물량 공세로
만들어낸 『원더풀 데이즈』.
이 작품의 흥행 실패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에 의
해 몇 번이나 지적되었고, 심지어 감독조차도 "욕심 같아서는 『센과 치히
로의 행방불명』의 200만명을 넘어보고 싶지만, 1차 국내 관객동원 목표는
100만명 정도다"라고, 손익분기점 380만을 이미 포기한 듯한 이야기를 하
고 있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200 몇십만을 넘어서도 이미 손익분
기를 못 넘는 것 아닙니까. 해외에서 판다고 하는데, 해외의 업자가 제정
신이라면 자국내에서도 흥행 못한 영화를 누가 비싸게 사겠습니까? 해외에
서의 수익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생각 외로 화면'발'이 아주 수준급이기 때문에 DVD 판매는 좀 될지 모르겠
습니다만, 그래봤자 그 수익은 DVD 제작사와 영화 제작사가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 도움은 안될 것일테죠. OST도 마찬가지고.
그럼 간단히 말해서, 투자자는 망한 겁니다. 김문생 감독은 투자자를 멋
지게 속이고 자기 좋은 작품 만든 거고요.
솔직히 『원더풀 데이즈』, 87분의 러닝타임 내내 눈이 아플 정도로 너무
나도 퀄리티가 전체적으로 높은 화면이, 그야말로 쭉 이어집니다. 지겨울
정도로.
화면 퀄리티도 좀 강약을 줄 것이지, 캐릭터 2D부터 CG니 배경 미술이니,
하나 같이 전부 퀄리티가 높다 보니까 눈도 아프고 연출에 임팩트도 안 살
고 문제 많습니다. 화면에 돈을 쳐발랐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요.
원래 스토리도 재미 하나 없고 설정도 진부하기 짝이 없으며 캐릭터에 감정
이입은 전혀 안되는데, 화면 퀄리티는 87분 내내 변함 없이 눈 아플 정도
로 높으니, 언밸런스한 것은 둘째 치고 너무나도 지루합니다.
평론가들이 "상상력 면에서 관객의 허를 찌르는 충격이 없다", "이야기를
끄는 힘이 부족하다", "볼거리가 충분함에도 지루한 느낌을 준다"라고들
말했는데, 뭐 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볼거리가 너무 많은, 즉 화면에 정보를 너무 많이 담다보니 (게다가 실속
은 하나도 없는 주제에) 관객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실제로도 피곤했습니다. 밤을 거의 새우고 갔더니.)
아무튼간에, 앞서도 말했지만 솔직히 7000원은 안 아깝다는 생각입니다.
7000원이래봤자 요즘 할인카드 다 있는데 7000원씩 필요도 없고, 어디 가
서 밥 한끼를 먹어도 5, 6000원은 하는데 그 정도 돈 들일 만큼은 한다고
봅니다. 화면'만'으로도.
영화 카피처럼, 『원더풀 데이즈』가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바꾼다!'
고 생각하면 좀 곤란하고, 2003년 7월 17일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희망의
날'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둔 채, 그냥 가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
술 수준이 이 정도까지 왔다는 것만 확인하고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정도까지는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요. 『오세암』에서도 전 그런 것 느
꼈고, TV애니메이션들도 솔직히 『바다의 전설 장보고』니 『아장닷컴』이
니 『사이버영혼 바스토프 레몬』이니, 나름대로 퀄리티 나와줬다고 봅니
다.
『원더풀 데이즈』는, 지난 4월의 우려를 깨고 그나마 퀄리티 최고조로 높
여줬네요. 126억원을 날려먹은 부분은 용서할 수도 없고, 한국 애니메이
션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될 것이라는 점도 봐주기는 힘든 문제이
지만, 어쨌거나 다들 보고 직접 판단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앞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에 진정한 '희망의 날'은 올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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