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의 초상:원더풀 데이즈】
writteb by 강상균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애니마 포럼 연구원)
from
「한국 애니메이션의 비전에 대한 토론회─『원더풀 데이즈』를 중심으로」
주관:한국애니메이션학회·세종대학교만화애니메이션산업연구소
후원: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2003.07.11)
※원문을 작성한 강상균 작가의 허락 하에 공개하는 글입니다. 저자의 허
락 없는 무단전재를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2003.08.09 [miru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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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을 창작하는 사람들은 묘한 긴장감
을 느껴왔을 것이다. 제작비 10억도 투자받기 어려운 열악한 제작 환경 속
에서 100억이 훨씬 넘어가는 초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왔기 때문이다. 바로 김문생 감독의 『원더풀 데이즈』가 그 주인
공인데, 기획 2년, 제작 5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시간과 무수한 난관을 극
복하고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에 우선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부터 간절
하다. 그러나 시사회를 통해 드러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막대한 제작규모
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여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이 창작 애니메이션계
를 강타할 것이란 우려와 단 한번의 성공사례도 보여주지 못해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재고시킬 계기라는 희망이 개봉직전 첨예하
게 대립하는 양상마저 보일 정도로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부정적인 시각의 근거에는 대부분 스토리와 내러티브, 시나리오
에 대한 문제제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의 출발점이 1997년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송창수 원작의 시나리오이며, 그 동안 국내외 작가 여러분이
참여하여 백번을 넘게 고쳤을 정도로 시나리오를 중요시했다고 하는데도 이
러한 평가가 내려진 것은 정말 의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시나리오
부터 문제가 있는 작품이 이렇게 엄청난 금액을 투자받을 수 있을 리가 없
지 않은가.
그러나, 김문생 감독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영화는 미장센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책으로 읽으면 된다. 미래가 오늘 우리의 모습과 같
다는 보편적 스토리를 극적장치를 통해 표현해내고 싶었다. 스토리상으로
불친절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헐리우드 같이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
명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연합뉴스 인터뷰/김병규 기자/출처:『원더풀
데이즈』 홈페이지 - 2003. 7.3)며 시나리오상의 문제를 간접적으로나마 수
긍하는 상황인데다가, 의도적이었다는 그의 해명조차 지난 인터뷰에서 『
아키라』의 오토바이 씬 등 영향받은 작품들에 대해 언급하며 “결국 관객
들에게 보여지는 건 드라마지 장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략) 결국 중
요한 건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 중심의 영화이다” (JOYCINE 뉴스/영상미니
어쳐체험전시관 『원더풀 데이즈』 작품발표회/출처:『원더풀 데이즈』 홈
페이지 2002.10.25)라고 말했던 것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기에 혼란만
더해진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는가? 실제로 이 작품을 접했던 개인적 견해로도 시
나리오에 대한 지적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긴 힘들 듯 싶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제점은 『원더풀 데이즈』라는 작품 하나에 국한된 것
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창작 애니메이션, 특히 극장용 장편을 만드는 시
스템이 얼마나 초보적이고 허술했는가를 자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이르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짧은 전성기가
끝난 후, 1995년 정부차원의 애니메이션 지원정책이 시작되기까지 이어진
창작의 공백기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제작자들과 사회적·문화적으로 고양
된 관객의 수준 차이를 엄청나게 벌려 놓았다. 특히 일본과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며 청소년이나 성인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적극
적으로 수용하게 된 결과, 여전히 70년대 아동대상의 제작방식에 안주하고
있던 우리 애니메이션은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비아동용 애니메이
션 시장에서 설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창작 능력이 있는 대규모 제작사들이 이러한 난관을, 시행착오를
감수하며 적극적인 투자와 개발로 작품의 수준을 높여 극복하려 한 게 아니
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이라는 근시안적인 대처로 일
관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 “아동용”에 대한 인식은, 아동을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유치해야 한다, 수준이 낮아야 된다는 자기기만이 내포된
것이기에 지극히 위험하다. 오랜 하청작업의 타성에 젖어 애니메이션에 대
한 평가를 원동화가 잘되었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헤
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내세운 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창의력은 전무하다시피한 사람들이 창작을 독
점한 상황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기형적인 창작 시스
템을 만들어 냈다. 창작의 설계도가 되어야 하는 시나리오가 별다른 비중
을 차지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쓰여지고, 작품성보다는 과장된 개그컷이나
번쩍거리는 시각적 효과로 시선을 끄는 게 애니메이션이며, 귀여운 캐릭터
나 팬시상품이 많이 팔리면 성공적인 작품이라는 개념을 심어준 것이다.
과연 그럴까? TV 애니메이션이라면 제한된 시청자를 대상으로 소기의 목
적을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완전히 이야
기가 다르다. 우선 전인구가 4000만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극장을
찾는 사람을 애니메이션 관객이냐 영화관객이냐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
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수준 높은 우리나라 영화들이 계속 발표
되고 세계적 대작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어떤 극장주도 제한된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함이 무기인)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스크린을 할애할 리
가 없다.
결국 누구라도 즐길 수 있는 세련된 작품으로 영화와 경쟁하여 스크린과 관
객들을 확보해야 된다는 얘기인데, 기존의 안일한 창작 관행과 정신으로서
는 결코 시나리오부터 목숨걸고 답을 찾는 영화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창작 애니메이션은 시나리오부터 시작되는 창작시스
템을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쉬운 일만
은 아니다. 제작규모를 감안할 때 소위 애니메이션 전문 시나리오 작가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존 하청작업에
서는 외국에서 시나리오가 날아오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제작과정 자체에 시
나리오 작가가 불필요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에 비해 영화아카데미를 비롯한 각 대학 영화과의 역사가 20년을 훨씬 넘
어가며 독자적인 창작 시스템을 구축한 영화 쪽의 경우, 감독이건 작가건
창작을 하고 싶은 사람은 우선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을 구비하는 게
당연시된다. 좋은 시나리오 없이 작품을 만드는 건 설계도 없이 고층건물
을 짓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는 것이다. 현재 수백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한국영화와 상영관조차 잡지 못해 예매하기 운동을 해야 하는 한국 애니메
이션의 위상 차이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원더풀 데이즈』의 시나리오는 최소한 창작의 영역
에서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아동용에서 벗어나 청소년,
성인을 대상으로 영화와 경쟁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문제는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처럼 수많은 설정과 서브스토리가 넘쳐흘러 짧은 런닝타임이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높은 영화와 직접 비교되다
보니 허술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우리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이 대부분 시나리오를 논할 것
도 없이 한 눈에 거부감을 주는 조악한 수준이었다고 한다면 『원더풀 데이
즈』의 경우 다른 부분들이 기대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제공했기 때문에 이
작품을 감상하며 약점이라고 지적된 시나리오적인 부분을 재미있게 보는 사
람도 있고, 외국에서의 반응도 호의적이라고 하니 극단적으로 시나리오가
좋다 나쁘다하는 평가는 개봉 후 직접 작품을 관람할 관객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다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작품의 시나리오에 대해 가능한 한 합리적으
로 점검해볼 필요는 있다. 『원더풀 데이즈』로서 한국 창작 애니메이션이
종언을 고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점검은 이후 시나리오를 토대로 전달하
려는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스토리텔링하여 극장에서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
는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드는데 시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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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본론
그렇다면, 과연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점검해 보아
야 하는가? 솔직히 우리의 창작 애니메이션계에선 시나리오에 대한 노하우
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다.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
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감독이나 PD의 개인적 판단이 전부일
경우가 많고, 또 판단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들조차 전체 작업을 통괄
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추출해낼 수 있는 역량이 충분치 못하다.
당연한 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현장에서 작업을 했다고 해도, 애니메이션이
거의 창작되지 않는 상황에서 창작에 필요한 경험을 쌓을 수는 없는 일 아
닌가. 이러한 문제는 당분간 해결될 기미가 없어 보인다. 한 예로, 100개
가 넘는 애니메이션 관련 교육기관 중에서 전문적인 시나리오 작가를 양성
시키는 과정은 전무하다시피 하며, 아예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애니메이션
학과에 입학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애니메이션을 영화와 같이
종합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영역에 한정시키는 선
입관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감히 제안하건데, 현재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를
쓰고 평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영화적 시각에서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관객의 입장에서는 영화건 애니메이션
이건 극장이라는 똑같은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며, 실제 인물을 촬영했든
지 그려냈든지 하는 표현방식에 상관없이 감독이 제시하는 스토리텔링을 통
해 극의 전개에 공감하고 참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더풀 데이즈』처럼 극화적인 캐릭터와 사실적인 스토리를 가지
고 있는 경우,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인가 실사영화인가 하는 점은 시나리
오 상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갖기 힘들다. (주:『매트릭스』, 『스타워즈』
같은 작품의 경우 CG활용도가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이러한 작품의 시나리
오를 그대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썼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듯이, 『원더
풀 데이즈』의 경우에도 상기 방법에 의해 실사회시킬 경우 시나리오 상의
차이를 상상하긴 힘들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필자는 『원더풀 데이즈』의 시나리오 최종고 (주:해당
시나리오 버전은 틴하우스에서 제공한 “원더풀데이즈 시나리오 최종본”이
다. 다만 씬 구분으로 정리된 원고였기 때문에 필자가 분석의 편의를 위해
사건이 벌어지는 주요 장소를 기준으로 구분하여 분석한다)를 개인적인 감
상은 최대한 배제하고 현재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평가하는 검증된 기준
몇 가지에 의해 점검해보고자 한다.
그 기준으로 심산 작가가 번역한 『시나리오 가이드』 (데이비드 하워드·
에드워드 마블리 지음/심산 옮김·한겨레 신문사·1999)의 평가 기준을 사
용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충무로, 혹은 헐리우드식 잣대를 국산 애니메이
션에 들이댄다고 비난해도 별 수 없다. 이건 옳고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나리오가 관격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 성과를
예상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관객이 극장으로 찾아와 창작 애
니메이션을 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면 이후의 분석은 완전히 무시
해도 좋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영화를 보기 위해 모이는 관객의 발길을
조금이라도 애니메이션쪽으로 돌리게 만들고 싶다면 영화 쪽의 성공 사례를
배우는 것은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벤치마킹 아닌가.
1. 좋은 스토리의 요건을 갖췄는가?
위의 책에서는 좋은 스토리에 대한 기본 요건을 다음과 같은 다섯 항목으
로 제시하고 있다.
-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누군가’에 관한 스토리다.
- 그 누군가는 어떤 일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한다.
- 그 어떤 일은 성취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 그 스토리는 최대한의 ‘정서적 임팩트’와 ‘관객의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 그 스토리는 ‘만족스러운 엔딩’으로 맺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반
드시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상의 조건들이 『원더풀 데이즈』의 시나리오에는 잘 반영되어 있는지
하나하나 따져보자. 여기서 ‘누군가’는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
즉 주인공이다. 그렇가면, 『원더풀 데이즈』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핵심인물은 수하, 제이, 시몬 세 명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잿빛 구름으
로 덮인 세상에 원더풀 데이가 오게 한다는 내용이라고 하면, 주인공은 당
연히 수하가 된다. 닥터 노아의 뜻을 계승하긴 했지만, 결국 제이에게,
우디에게 했던 푸른 하늘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에코반과 싸
우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수하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수하는 원래 에코반
사람이었다가 시몬이 뒤집어 씌운 누명 때문에 죽은 사람이 되어 마르에 숨
어 살고 있으며, 푸른 하늘이 있는 지브롤터로 가기 위해 글라이더를 만드
는 사람이다. 숨겨진 과거와 애달픈 사연도 있고 다른 이들에게 원더풀 데
이를 선사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한다. 충분히 감정을 이입할 만한 설
정이다.
그러나 수하가 어떤 일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하는 가에서부터는 의문이
든다. 설정은 현실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리버럴리스트 (주:「
월간 뉴타입」 2003년 7월호·대원 씨아이 발행·『원더풀 데이즈 설정자료
집』중 제작진이 분석한 수하의 성격)라고 하는데,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레지스탕스임을 주장하는 불량배, 핫도그 일행과 충돌하며 동생같은 우디
를 데려오고, 가끔 닥터 노아의 심부름으로 에코반에 침투하는 게 시나리
오상 제시되는 수하의 모습니다.
그다지 뭔가를 열심히 하려는 (혹은 하지 않으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
는다. 시나리오를 통해 구체적으로 점검해 봐도 마찬가지다. 어른인 수하
가 강력하게 하려는 일은 5차례 정도 나오는 데 다음과 같다.
- 장면 4∼7 : 에코반 1차 침투 - 닥터 노아의 요청으로 수동적 행동
- 장면 17 : 시위현장에서 핫도그들에게 피격당할 뻔 한 제이를 구함
→ 자발적 행동
- 장면 20 : 자신을 찾아온 제이를 돌려보냄
→ 제이를 보호하기 위한 자발적 행동
- 장면 32 : 우디를 구하려고 시몬과 결투
→ 우디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 행동
- 장면 39∼44 : 에코반 최종침투
→ 우디와 제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 행동
상기 장면들에서 알 수 있듯이 수하는 주변사람들 잘 챙기며 순순히 희생
을 자초하는 다정하고 정의로운 전형적 캐릭터일 뿐이다. 지브롤터를 꿈꾼
다고 하면서도 현실을 버리고 떠나겠다는 어떠한 시도도 없으며, 말로는
영웅노릇 할 생각 없으니 에코반에는 가지 않겠다고 해도 이미 닥터 노아의
부탁에 심부름 삼아 오가던 모습까지 보였으니 그것도 설득력이 없다. 어
렵게 찾아온 제이를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차갑게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두말않고 받아준다.
드라마가 갈등을 통해 구축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주인공 수하에게는 드라
마를 만들 만한 갈등 요소가 거의 없거나 너무나 쉽게 해결되어버리는 셈이
다. 심지어 푸른 하늘을 보여주기 위해 최종침투를 결심했을 때에도 장애
물은 수하 자신의 결심뿐이었을 정도다. 철옹성이라고 계속 주장했던 에코
반이 이렇게 쉽게 뚫리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인 듯 시몬이 강화시킨 경비
병들을 부관이 마르작전에 다 내보내는 친절을 베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장면 40은 갈등과 드라마를 약화시키는 대표적인 자충수로 보인다. 『
카우보이 비밥』에서 스파이크가 가면 죽는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함정으로 뛰어드는 장면과 비교해보면 왜 『원데풀
데이즈』가 심심해 보이는 지 금방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성취하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어야’ 할 델로스
시스템 정지가 누구나 맘만 먹으면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로 보이기까지 한
다. 실제로 그 중요하다는 에코반의 심장부 델로스 컨트롤룸에 수하, 제
이, 시몬, 부관 할 것 없이 누구나 자유로이 드나드는 덕분에, 장면 44
는 아무리 오페라적인 연출로 임팩트를 주었다고 해도 긴장감이나 비장미를
느끼기 힘든 클라이막스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갈등이 부족하고 드라마가
빈약한 채 스토리가 전개되다 보니 관객이 정서적 임팩트를 갖기도 힘들다.
갈등을 통해 관객은 기대와 두려움, 놀라움을 느끼며 스토리를 체험하는
법인데, 『원더풀 데이즈』의 스토리텔링은 너무나 평탄해서 화려한 영상
을 통한 시각적 임팩트 이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엔딩
은 만족스럽다. 모두에게 파란 하늘이 돌아오며 지금까지의 갈등이 모두
해소되고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것이
엔딩 뿐이라면 곤란하다.
2. 3장이론
3장이론은 극장용 상업영화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다. 시나리오 전체를
3등분으로 나누어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인
데, 절대적이지는 않겠지만 헐리우드와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거의
모두 3장이론에 의해 쓰여지고 분석을 받는다. 이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
음과 같다.
1장 - 스토리가 펼쳐지는 세계와 주요 등장인물 소개.
스토리가 기초하게 될 주요 갈등 설정.
보통 주인공이 하고자 하는 일이 확정되고 장애물들의 윤곽이 드러
남.
2장 - 주인공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부각.
2장이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은 변화하거나 발전 (하라는 압력을 받
게 됨).
스토리의 서브플롯들이 폭넓게 발전.
3장 - 주인공의 메인스토리와 서브플롯이 제각기 해결.
제시되었던 갈등이 모두 해결.
(새로운 갈등이 제시될 수도 있음)
그렇다면 『원더풀 데이즈』는 3장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시나리오
일까? 필자가 구분한 45개 장면을 위의 기준에 맞추어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1장 - 장면 1∼13
에코반과 마르에 대한 설명.
수하, 제이, 마르 등 주요 인물 등장.
에코반의 마르말살음모와 노아의 델로스 시스템 정지시도가 충돌.
제이에게 파란하늘을 보여주겠다는 수하의 욕망이 제시.
2장 - 장면 14∼38
수하-제이-시몬의 감각관계 발전.
핫도그들을 비롯한 마르인과 에코반인의 대립심화.
제이가 시몬의 음모를 알고 수하를 선택함.
우디의 부상과 제이의 에코반 떠남을 계기로 수하가 델로스 시스템
정지를 결심.
(영웅이 되지 않으려던 수하가 변하게 됨)
3장 - 장면 39∼45
델로스 시스템이 정지해서 원더풀데이가 돌아옴.
시몬의 희생으로 삼각관계 해소.
에너지원의 교체로 에코반과 마르인 사이의 평등이 도래.
핫도그들이 희생을 무릅쓰고 복수에 성공.
이에 따르면 1장이 13개 장소, 2장이 25개 장소, 3장이 7개 장소로 구
성되어 있으며, 컷의 수로는 1장이 392컷까지, 2장이 955컷까지, 3장이
1217컷까지이다. 대략 1.5대 2대 1의 비율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반적인 황금률이 1:2:1이고 그나마 1과 3장의 길이가 줄어들어 영화의 본
론을 빨리 시작시키고 심플하게 끝내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니, 1장의
길이가 좀 긴 셈이다.
물론, 새로운 세계관을 소개해야 하는 SF물의 특성상 1장을 짧게 끝내기는
힘들겠지만 현재의 시나리오가 2장의 갈등이 약해 드라마가 별로 없고, 이
점이 작품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1장을 좀 더
줄이고 그 분량을 2장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2장에서 보여지는 갈등은 수하와 제이와 시몬의 삼각관계,
핫도그들의 에코반 트럭 탈취와 그 보복, 우디와 수하의 문제, 에코반인
과 마르인의 대립정도다. 앞서도 말했지만 핵심이 되어야 하는 ‘수하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메인플롯이, ‘난 영웅이 되기 싫어’ 정도의
장애를 받다가 우디의 부상과 제이의 참여로 쉽게 해결되어 버린다.
2장에서 영웅이 되기 싫은 수하를 괴롭히는 장애물이 보다 많이 등장하고,
수하가 이를 이겨내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면 『원더풀 데이즈』의
시나리오는 훨씬 매력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3. 주인공과 적대자의 갈등
앞서도 밝혔지만, 주인공은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려고 대단히 노력하
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는 매우 어렵다’라고 정의할 때의 그 ‘누군가’다.
반면 적대자는 주인공의 추구를 실질적으로 방해하는 무엇으로서 ‘성취하
기 어렵다’고 할 때의 그 ‘어려움’에 해당된다고 한다. 따라서 적대자
는 사람을 수도 있고, 주인공의 마음일 수도 있고, 자연재해나 괴물일 수
도 있다.
『원더풀 데이즈』의 경우 주인공이 수하이고, 수하가 하려는 일이 사람
들 (구체적으로 제이와 우디)에게 파란 하늘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적대자가 될 것이고, 주인공과 적대자의 갈등이 결
국 이 작품을 이끌고 가는 핵심적인 드라마가 될 것이다.
그런데 자꾸 반복해서 말하게 되지만, 수하가 하려는 일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자연히 그 적대가 또한 선명하지 못하다. 대표적인 적대자는 시몬이
겠지만, 시몬은 메인플롯의 적대자 역할보다는 제이와 연결되어 서브플롯
의 적대자 역할을 한다.
때문에 제이가 부상했을 때 손쉽게 적대자에서 지원자로 변모해버리고, 대
신 긴급 투입된 부관이 파란하늘을 보여주려는 것을 막으려 하는데, 그 전
까지 부관과 수하가 별로 서로를 신경쓰지 않던 사람들이라 오히려 시몬과
부관의 갈등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노골적으로 적대자임을 선언했던 수하 자신의 마음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파란하늘 보기에 굴복해버리고, 침투 과정에서 에코반의 철통같은 경비 시
스템도 거의 무용지물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이 시나리오는 적대자가 없거나 거의 미미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캐릭터 설정에서 수하와 제이와 시몬이 각기 미래와
과거·현재를 상징한다며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어도, 실제 작품에서 이
들의 모습이 설정상의 그것을 선명히 드러내 연기하지 못하고 있다면, 플
롯이 진행되고 드라마가 만들어지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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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결론
지금까지 『원더풀 데이즈』의 시나리오를 영화적 관점에서, 특히 뼈대
라고 할 수 있는 구조와 드라마투르기에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본론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이 시나리오에는 영화적으로 봐도 세련된 기법
과 묘사가 사용된 부분도 많은 반면, 정보의 전달을 지나치게 대사나 나레
이션에 의존하여 현실감이 떨어지는 문제점 같은 것도 많다.
하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이 작품의 시나리오가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데 다소 약점이 있다고 해서, 작품 자체를 형편없는 것으로 폄하해
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말로는 시나리오가 중요하다, 최우선이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시나리오에
별다른 비중을 두지 않는 관행이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에 얼마나 치명적인
가를 실제 작업에 참여해 본 사람이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원더풀 데이즈』는 그런 의미에서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깨닫고 올바르게
창작이 이루어 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시 한번 말
하지만 『원더풀 데이즈』정도의 작품이니까 이 정도로 구체적인 시나리오
분석도 가능하고 문제제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가 약하다든지 구조가 이상하다든지 해도, 지금의 『원더풀 데이즈
』 시나리오가 바로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이 현재 뽑아낼 수 있는 베스트 시
나리오고, 우리 애니메이션 시나리오의 초상이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꾸 들여다보고 가꿔야 예뻐지지 않겠는가? 엄청난
산고를 이겨내고 탄생한 『원더풀 데이즈』가 아름답게 자라서 활짝 피는
모습을 보길 고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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