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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76 선정우   mirugi   10-04   429 김진님 인터뷰 및 각종 기사문 모음 <2>  18K

#4576   선정우   (mirugi  )
김진님 인터뷰 및 각종 기사문 모음 <2>        10/04 11:12   307 line

             ≪김 진 선생님 잡지 기사 및 인터뷰 모음≫
                           F I L E # 02

                                    transcribed by mirugi (95.07.20)


■르네상스 'MY LIFE, MY HOBBY' : 92년 8월호

                 ∈ 꿈과 사랑담은 휴식 같은 친구 ∋

―컴퓨터는  김진에게 있어  비밀 일기장  같은 소중한  친구.  그를 대
할때마다 평온함의 미소를 절로 띄우게 된다고.―

이색  SF 환타지   '러브 메이커'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소재,  새로운 
구성의 작품을 선사한  김진.  컴퓨터 오락게임속에  들어간  주인공들의  
우정찾기를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듯,  그의 취미는 컴퓨터다.
지금은 컴퓨터가 대중화되어  특별한 취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며 한사
코  공개를 거부하기도 한 그의 작고 귀여운  친구이자 자랑인  컴퓨터는  
32bit 60메가 바이트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국산 중에서는 제일 가볍고 작은 몸매(?)를 가진 이  컴퓨터는 액정화면
인데도 VGA Gray  16색이라는 화면과,  FAX 모뎀과 마우스를  탄창식으로 
바꿔낄  수 있는 액세서리도 갖추고 있다.
일반 컴퓨터 매니어들은  그의 컴퓨터 기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지
만 제  시간을 갖기 힘든 만화가로서,  만화와 연계된 취미로서의  컴퓨
터는 그에게 기종  이상의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김진은 '달의 신전'이나   '러브 메이커'에서 컴퓨터가 출력한 그림―물
론 그림을 읽어들이는 스캐너는 따로 있다.―을 사용하여 펜으로는  표현
하기 힘든 효과를 연출하기도  하였고,  스토리의 정리나 송고,   자료정
리 등에 십분 활용하기도  하며,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가끔 오락을 즐
길 수 있는 여가의 자리를 제공하는 컴퓨터는 그의 소중한친구.
김진이 컴퓨터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2년여전.  평소 알고  지내던 
모잡지 광고국장이  자신의 편집용으로 구입했던  컴퓨터를 여의치  않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에게  선물한 것.
당시 김진에게   있어 컴퓨터는 만능기계로 인식되어 있었다.   방대해서 
처리하기 힘든 자료들을  정리하거나,  컴퓨터를 사용한  애니메이션으로 
차를 360°돌려보는 것 등등...    컴퓨터에 통달한 매니어들조차도   한
참이 걸려서야 이룰 수 있는 작업들을 그는 컴퓨터의 키보드도  두드리지 
않고 야무진 꿈으로 키웠던 것이다.

"원래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은 더 심한 편이고,  늘 꿈만 꾸고 다른  세
상 같았던 컴퓨터를 선물로  받았을 땐 어안이 벙벙했죠.  그때  그분은 
컴퓨터에 대한 끝없었던  나의 환상을 정리해주면서 '계산은 기계가   해
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미적재능'이라는 교훈도 일러주셨죠."

그때부터 김진은  여유로운 시간이면 컴퓨터에  매달렸다.  하지만 만화 
같지 않아  혼자 배우기엔 힘들었던 컴퓨터는  어느새 그 기능을  제대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갖은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있었다고.
마침 컴퓨터를 칠줄 아는 문하생이 들어와 바이러스의 온상인  컴퓨터를 
정리하면서 가르침(?)을 주어  어느정도 워드프로세서를 칠 정도가  되자 
꿈의 결정체인  컴퓨터 그래픽으로 눈을 돌려  학원의 OS 과정을  2주일,  
AUTO-CAD (설계 및  도면제작용 그래픽  프로그램)  과정을 5개월  정도 
다니면서 김진은 컴퓨터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컴퓨터는 김진의   바램과는 달리 더 많은 재능을 그에게  요구했
다.
'푸른 포에닉스'에 등장하는 우주전함을 용기내어 설계해 봤지만  그때마

다   이상한 괴물로 변해   그를 실망시켰고,   토끼 한마리를  그려주면  
걷고, 뛰고, 춤출 것이라는 그의 환상을 야무지게 무너뜨리는 것이다.

"여기쯤에 미사일  두 대...   발사대는  여기...   적당히...  이런 식
으로 그려  캐드를 돌려보니 앞은 우주선이 맞는데 뒤에는 삐죽한 칼...   
몇달씩 계산하고 꾸준히 고쳐  주고,  그래야 복사기 위에 나비 한 마리 
앉을 수 있는 게 {*주 - 아마 '신도리코'의  유명한 CF를 말하신 모양입
니다.} 컴퓨터고,   그려놓고도 자연스럽지  못한 동작으로 엄청 씹히는 
게 컴퓨터란 걸 실감했죠."

컴퓨터가 결코 만능기계(?)가  아님을 확인한 김진은 그때부터  컴퓨터를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여 활용하기 시작했다.  주변 아마튜어 컴퓨터 매
니어의  도움으로  프린터도 연결하고,  1200bps  모뎀도 장착하고,  PC 
통신도 하면서 비밀 일기장처럼 항상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자신만의 
친구로의 변화를 모색한 것이다.
하지만 산수에 취미가 없어(?)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는  김진
이지만,   그  꿈은 항상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싶은 만화가로
서의 희망과 같이 변함이 없었다.
푸른 포에닉스에 등장하는  우주전함을 완전하게 설계해 그가 선장이 되
고  그의 주인공들이 선원이 되어 우주로  날아보고픈...

"컴퓨터에 대한 나의 시각은 꽤 환상적이었죠.  시간이 흐르고,  컴퓨터
를  알게 되면 될수록 게으르고 싶었던 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내 
자신없는 곳을 대신 보조해 주고,  시간도 벌어주는 이른바 반항없는 노
예같은 걸 원한 건 아닐까...하고요."

모든 꿈을 접어,   이젠 책꽂이 한 구석에 놓아두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그의 소중한 친구로 남아있는 컴퓨터.
마우스만 누르면 만화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등,  정적인 만화와  동적인 
비디오를  합쳐 컴퓨터를  통해 만화를  시청하는 '전자만화  시스템'등,  
많은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최첨단 문명의  이기로 등장한  컴퓨터지만,  
그  반대로 잘못  사용하면 흉기(凶器)가 될 수 있다며,  아마튜어 컴퓨
터 매니어로서의 염려도  아끼지 않는 김진에게 있어서의 컴퓨터는 영원
히 작고 소중한 친구이면서 미래의 꿈이었다.


■댕기 '단발머리 까까머리-작가가 추억하는 학창시절 이야기' : 93년  2
월 18일자

《허망한 슬픔이 결코 가치없었던 것은 아니다》

글쎄...난,   학창시절 얘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들어보면,   
친구,  선생님,  즐거운  소풍,  수업시간의 에피소드,  특별활동 등 할 
얘기가 많은 듯 보이지만 글쎄...  나의 학창시절은 백지같이 하얗게 날
아간 기억이다.
나에게 학교란,   체형에도 안 맞는 개미허리  같이 졸라맨 교복을 매일 
아침 입어야 했던  시절이고,  얼굴에도 안 맞는 단발머리를  알레르기로 
목이 빨갛게 붓거나 말거나 풀 빳빳이 먹인 하얀 칼라 위에 얹어야  했던 
시기이며,  하다못해  왼 가르마를 타면 교문앞에서 튄다고 잡혔던  시기
다.
지금 생각하면 할 수록 우스운 게 그 교복이라는 건데,  칼라에 풀을 매
일 먹일 수도 없는  일이고 집에서 그렇게 챙겨주는 아이들도 아닌  바에
는 플라스틱으로 된 칼라를 달았다.
그때 문방구 아저씨 왈,  "세상 참 좋아졌어,  이런 게 다 나오고..."
난 그게 마치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에 나오는 그 웃기는 공작 패션의 
러프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른들 얘기로는 까만 교복에 하얀 칼라
에 단발머리 때가 가장 순수하고 예쁘다나,  뭐라나...  그러나 내가  어
른이 된 지금  보기에는 교복 때문에 더예뻐지는 건 일부 특권 미모의 
기준이겠지.   어쨌거나 난 교복이  마치 장례식에나 나옴직한 칙칙하고 
획일화된 예복 같았다.   그 당시 소원이라면  아마도 우리 학교 교복이 
조금만 양장 스타일이거나,   하다못해 귀밑 1센티 정도에서 벗어나기라
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전후 일본의 잔재 같아 보인느 그 지
긋지긋한 단발머리라는 게 아무튼 6년을 가는데 나중에는 에라  모르겠다 
잡힐때까지 기르고 풀도 안하고 그야말로 땡깡을 부리며 살기  시작했다.  
그땐 그 정도의 자유를 외쳐도  문제아였다.  머리핀은 귀 위 어디,  뒤
통수에 가 붙으면  불량이다.  교복 허리는  어디,  키가 자라서 짧으면 
단이라도 내서 입지!! 하며...

〈세상은 차가왔다.  몇 가지 만을 제외하고...〉
얼마전 고교를 졸업한 누구 말이 학교 다닐 때 치마가 너무 입기  싫어서 
아침마다 새벽같이 등교했다는  얘길 듣고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구나 생
각했다.  어쨌든 학교  다닐 때의 그 깔끔한 친구들은 나에게 감탄을 자
아내게 했는데 언제나 깨끗한 칼라에,  머리칼 털끝 하나도 물칠해 넘길 
정도의 청결을 자랑했다.  그런 것이 여학생의모범이라고 할 수도 있었
겠지만 왠지 난  옥죄는 듯한 그 정결성에  지금도 현기증이 다 날 정도
다.  그런  애들은 대부분 누구누구가 빵집에  가서 빵 먹다가 걸렸다고 
얘기가 나오면 환멸하는 태도를 보인다.  어떻게 학생이 그럴 수가!!
지금 보고 촌스러워하는 70년대의 얄개전 같은 빵집 데이트도 우리  현시
을 무시한 내용이었다.  우린 '여고 졸업반'에서의 임예진이 같은 긴 머
리를 구경한 적 없고,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란 건 갈 데까지 간 애들의
얘기였는데,  그렇게나 현실성 없는 영화가 극장마다 줄줄이 걸렸었다.
우리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보통의 가정주부로서의 통상 개념과는 확실
히 다르셨는데  국민학교 2학년  이후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고,  
시간적으로도 어려워서  나를 그다지 쓸고  닦아주지 못하셨다.  덕분에 
유치원때며  국민학교 1학년때까지만  양장점까지 가서  맞춤옷  해입고,  
그 뒤로는 자유방임.   하고싶은 대로 제멋대로 국민학교 과정을 마쳤는
데 갑자기  머리 치고 깜장  운동화에 깜장 스타킹,   깜장  옷이라니...  
성가대  같은 곳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리고 부설!!  한술 더 떠서 그 
학교는 미션계  학교였나.   내가 학교 다니면서  가장 이해가  안됐었던 
건,  영어  단어를 하나 틀리면 한 대 맞고,   두 개 틀리면 두 대  맞고 
하는 것과,  무슨  본보기 세운다고 그 날까지 안잡던 떠드는 애 잡아서 
혼내기,  손톱 검사,   가방 검사,  일기장 검사 (후엔 안했지만) 뭐 이
런 것이었다.
그럴때면 애들 중 소수는 몸으로 때우고,  소수는 매 맞는 게 싫어서 잘
하고 뭐 이런 모양인데 잡힌 애들이 혼날때 안 잡힌 애들은 안도하고  잡
힌 양들에 비해 우월한? 자신들을 뽐내었다.  그야말로 유치원  애들이나 
할 유치한 짓이 고등학교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
좀 거창한  사고로는 어느 반 애가  가출했다가 돌아왔는데 엄마가  와서 
사정해 간신히 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런데 걔가 반성실에서 매일 반성
문 쓰는 걸 교장 선생님이 잔소리하자,  문을 쾅 닫고 나가 교장 선생님
이 진노,  드디어 퇴학 당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얘기는 우리가 1학년 
때쯤의 센세이션한 일이었고,  선생님들도 흥분하셨는데 오로지 미술  선
생님만 달리 말씀하셨다.   애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선생
들이 아이의 자존심 바닥까지 긁었다고.
그런 얘기는 너무도 많다.  애들 셋이 짜장면 집에 들어가는 걸 본 교장 
선생님이 그걸 쫓아올라가 정학을 먹였다더라...  (그 당시 규율로는  그
건 죄악이었다.)  좀  튀겨서 들리는 얘기도 있고 안들린 얘기도  있었겠
지만 내가 너무도 기가  막혔던 기억으로는 여름방학이 끝난 어느 날  교
내 아침방송이었다.   망상 해수욕장에서  교장 선생님께 인사한 학생은 
잡기전에 자수해라...   그 얘기인즉 남자 친구와 망상 해수욕장에  놀러 
간 학생이 교장 선생님을  발견?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너무나 예의
가 바른 건지 쫓아가서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야 개학 후 아침
방송과 선생님들의 협박으로  학교를 뒤졌는데 그 미련하게 인사성 밝은 
범인은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간 것이다.
또 한번 전원 수색당한  일로는 스티로폴로 된 학교 게시물을 어느  녀석
이 칼로 주욱 긁고 간 일이다.  아침 조회를 하는데 선생님 말씀,   자수
를 않으면 전교생의 지문을 검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게시물 근
처에라도 간 애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려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 사
건도 흐지부지  끝났지만 그은 녀서도 나쁘지만  대처 방법도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  과연 애들은 그렇게 다루어야 하는 괴물이었을까...   아침 
조회에 기습 조사하는  책가방 검사로 누구누구의 가방에서 로숀이 나왔
다,  만화책이 나왔다,   하면 이런 걸로 굴비 두릅 엮듯이 줄줄이 교무
실에 끌려가는 가엾은 중생들...  우는 아이,  버티는 아이,  자꾸 숨는 
아이,  그 일이  끝나면 돌아와서 '이건 누가 선생님께 꼰질렀다',  '우
리반 누구누구가  선생님 스파이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집에 연락 갈까 
걱정이 태산들 같다.  그런 얘길 집에 와서 하면 엄마 말씀은 하지 말라
는 짓들을 왜 하는  거냐 하시면서 동시에 선생이란 얼마나 째째한  직업
인가 웃으셨다.  (우리 엄마는 왕년에 잠시 교사셨다.)
그런 사건들은 많지는  않았지만 터질때마다 충격을 줘서 내겐,   선생님
들은 유치한 사건을 확대 해석해,   아이들의 장래 따윈 보지 않고,  무
우 토막 자르듯 애들 인생이나 자르는 듯 보였고,  그 뒤에 앉는 아이들
이란 남의 말이나  하기 좋아하고 불행한 친구들을 물어뜯는 듯  보였다.  
마치 자기들은  티끌 하나 없이  모범 학생에 모범  주부가 될 것  같이,  
(하긴 학교란 그런 것이다.   모범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가끔은 무
미건조하고 냉랭한,  남을  깔보는 무언가는 없는 것일까?  학교는  비장
하게 아이들을 훈련시켜 사회라는 전투장으로 내어보내는 것일까?)  모여 
저 잘난 듯하는 애들도 보였고,  난,  날이 갈수록 어두웠다.
세상은 차가왔다.   몇 가지만을 제외하고...   꽃들에게는 희망을  이란 
책을 한시간 내내 읽어주던 선생님,  교칙이 뭐냐고 화를 내던 선생님들
과,   죽은 친구가  생기자 종일  눈이 빨갛게  울던 아이들을 제외하고
는...  그건 경직되고  획일화된,  그러나 속할 수 밖에 없는 세계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오래 지난 지금 난 그때 친구들이 문득 문득 생각난다.   
무엇이 되었을까...  심장은 없고 머리만 있던 아이들은 아직도 그럴까?

〈대학 시절 우연하게 들어간 교지 편집부,  나에겐 과분한 선물...〉
확실히 난 아이들과 놀기에  좋은 대상이 아니었다.  교련 시간에 발 못 
맞추는 아이들  속에 들어있었고,  음악  시간에 4개밖에 안되는  음역을 
가진 내가 8개나 되는 음을 다 소화해내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었으니 춤
추고 노래하는 데에선 영 암적인 존재였다.  아이들에게 나란 존재는 그
저,  애들  기도문 못쓴 것 써주고,   그림 그려줄 때나 필요했던 것 같
다.  즐겁게 놀고  떠들지 못하면 마음을 여는데도 오래 걸리고 그런 아
이들은 배려받기 전에 이미 모든 상처를 다 받아 문여는 것이 더  서툴기 
마련이었다.  어쨌든,  내가 내 외로움 따위로 투정을 부리기엔 난  너무 
이기적이었고,  내 친구들은 너무 어렸다.  그런 면에 있어서 나의  학창
시절은 실패였다.  몽땅 잊어도 좋을만큼.
그러나,  내가 속했던 곳이  싫어서,  혹은 그의미를 잘 몰라서 머릿속
이 이미 하얗게 표백되어버렸다  해도,  그 제복의 시절은 과연 내 인생
에 얼마나 중요한 시기를  점유하고 있는가...  수업 시간 중에 읽던 그 
많은 책들은,  마르뗑 뒤가르의  '회색 노트'  (이 책을 읽기 위해 서점
을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  왠지,  하루하루  미칠 것 같이 슬프고,  죄어들 것 같은 억압으
로 책을 읽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끝도 없이 읽고 또  읽었
고,  순간순간을 절망케하는  저만 아는 듯한 친구 같은 건 사귀고 싶지
도 않았다.
남들이 알면 웃을 짓이었겠지만  고 3때,  대학이란 게 너무나도  지겹고 
마치 6년에 4년쯤  더 나를 가라앉히는 암초같아,   비상하고 싶어 신춘 
문예에 소설을 쓰고 있었다.  물론 떨어졌지만,  가고 싶지 않아서  예비
고사 시간에 엎드려 자고 그러다가 어찌어찌 들어간 대학.  관심도 없는 
학과에 사흘이  멀다 하고 데모인데다가,   데모에 관심없고 공부하기도 
싫은 나는 도서관이나 들락거리고 빈둥빈둥 출석부나 메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어간 교지 편집부는 내가 싫어서 들어간 학교가  내게 
과분하게 선물해준 기쁨이었다.   하얀 겨울을 작은 편집실의 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시들을 들여다보며 다음 할 일을 기다리던  기쁨...  
작품을 선별하고 교정 보고  컷을 그리고 편집 계획을 짜고,  인쇄소 쫓
아가서 글자 짜 박는 걸  보며,  조바심 내던 일들 등...  나의 학창 시
절 중...  내게 가장 좋았던 것은 내가 고교를 졸업하고야 찾아왔었다.
그래서 난 그 시기를 지나서야 나의 6년이라는 공백을 더듬을 눈을 가졌
던 것이다.   이해할 수 있어지게된 따뜻해진 눈으로...   그때 난,  내 
책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 내 친구들을 쳐다봤어야 했었고,  그랬다면 그 
시절이 좀 더 행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망한 슬픔이 결코 
가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버렸다 마음 먹었다 치더라도 그건 그
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고,   어느 순간 죽어도 아무 남을 게 없으리라
던 외로움들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될 것이다.  앞으로도 줄
곧,  내가 잃어버렸던 시간들은 그래서,  하얗게 표백된 채로 내게  소중
한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알이었다.  깨고 나와야 할...
어른들 말에 의하면,  지금 아이들은 그전에 비해 행복하다.  당연히  비
교 우위로  따졌겠지만.  하지만 불행의  무게는 언제나 똑같은  것이고,  
그때 죽고  싶었던 아이는  지금도 죽고  싶은 것이다.  단지 참고 있을
뿐...  난 그네에게,   죽어보지 말라고 얘기한다.  조금만 더,  죽어보
지 말라고...  네게 줄 것을 못 준 이들이 너때문에 슬프지 않도록,   넌 
그들에게 반드시 선물받아야할 책임이 있다고...  넌,  그들에게  그것을 
준비할 시간을 줄 의무가 있다고...


■윙크 '작가 릴레이 에세이/나의 데뷔' : 95년 4월 15일자

《타협할 수도 부딪힐 수도 없었던 시절!
이젠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원고를 들고 무턱대고 찾아간 곳은 그 당시 제법 유명한 잡지였다.   
그곳엔 일본만화를 홀랑 베낀  모 작가의 그 섬세한 원고를 책상위에  깔
아둔 편집장이 있었다.   그 아저씨는 그 당시 유행한 눈에 네모난 사각
창틀이 그려진 일본 만화  몇 장을 찢어주며 베껴오면 일을 주겠다고  했
다.  나는 그 만화를 책상위에 얹어둔 채 며칠을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고민하고,   결정한 진로인데,  아무리 쉽다해도  그
런 식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  그것은 나와 내 친구들에 대한 배신 행위
였고,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결국 데뷔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느리고 천천히 왔다.  그것은 생각보다
는 무척 초라한  것이었고,  경제적인 도움도  자기 만족도 없는 것이었
다.  일단 데뷔가 되자,   그 이후로는 원고를 들고 이곳 저곳을 찾는다
는 것이 차츰 불가능하게 되었다.  만화계에 아는 얼굴이 늘면서 우연히
라도 마주치게 되는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다.  내가 생각한  작가
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데뷔시절엔 누구나 잊을 수 없는 기억 한두 개쯤은 갖게 된다.  내게 가
장 충격을 준 사건은  약속을 한 편집장이 저녁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을 
때였다.  기자들도 한둘씩 사라지고,  편집실의 불도 반쯤 꺼져 가는데,   
막 데뷔한 햇병아리인 내  가슴속이 어떻겠는가.  지금 같으면 '내일  오
죠' 이렇게 쉽게  말하고 일어서야 했을텐데 그때는 그저 황망하여  깜깜
한 창밖을 보며 앉아있었다.  그러나 거의 8시 반에야 나타난 그의  말은 
'아니?  왜 와있어?'였다.  새까맣게 약속을 까먹은 것이다.  그날  삼정
릉의 언덕을 걸어가며  길바닥에 흘린 눈물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이 
자기 얘기를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많은 용기와,  일종의 수치심을 동반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일이 나를 팔기  위해 시장에 나를 내어놓은 것 
같이 수치스러웠다.   나의  용기가 한심했고,   평가받는 게  두려웠다.  
그 뒤 그림을 포기한 채  1년을 보냈고,  다시 재 데뷔한 것은,  다음해 
모 작가의 소개로 프린스 출판사에서였다.

가끔 우리 꼬마들이 (나는 우리집의 문하생들을 그렇게 부른다.)  부산까
지 울며 내려갔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었다.  혹은 데뷔란 그렇게 심
하게 자존심을 상해가며  얻을만한 것인가도 묻는다.  이미 데뷔가  끝났
으니까 우리 마음 같은  건 모르지 않느냐는 얘기도 듣곤 한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몹시도 서운하다.  작가가 되기 위해 겪
어야 하는 나와의 타협과,  신인 시절의 그 상처는 정말 평생 남는 깊은 
아픔이다.  데뷔와 함께  새까맣게 잊거나,  가볍게 데뷔해서 여전히  가
볍게 살아가는 오렌지 작가가  아닌 바에야 그 마음이 가진 심각한  부상
은 잘 치유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은 아니면서도 웃어넘기듯 말한다.
임마―  아직 멀었다.  넌 앞으로 두 번은 더 그렇게 울 일이 생길 거다
―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조금  더 지나면 데뷔가 아닌 동료들 
때문에도 울게 될 것이 뻔하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묻어두기가 얼
마나 힘든가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든 상처는 받기 마련이
다.  그러니 미리 많이 울어둘 필요가 없다고,  나에게도 못했던  충고를 
감히 하곤 한다.
나는 아직도 매일매일을 공부해 간다.  이런 마음과 저런 마음을.   이런 
이야기와 저런 이야기를.  다음에 태어날 때는 좀더 쉽게 인생을 살아가
기 위해서...  좀더 많이 웃고 살고 싶어서...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밝고  하얗고 상냥하게 변해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감히,  
나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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