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유년기의 끝. 관련자료:있음 [30566]
보낸이:선정우 (mirugi ) 2003-04-06 01:49 조회:355
상세한 설명은 차후에 다시 어디선가 언급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아래 글에 동의합니다.
기존에 저도 여러 채널을 통해 말했지만, 저는 지금이 한국 만화계, 혹은
애니메이션계의 위기라고 한다면, 그런 위기야말로 철저한 실용주의 노선
으로 타파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왜 남의 방식, 남의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해야 한다고 밖에 생각을 못 하
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그대로 도입해봤는데 실패했다고 한다
면 이제쯤은 사고 방식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 나라에서 미디어믹스가 성공하고 잡지 만화 체제가 성공을 했으면 모
르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다른 시도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되지도 않을 극장 애니메이션 붙잡고 있지 말고, 가능성을 보인 TV 애니메
이션이나 OVA 시장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눈을 돌린
회사들 중에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곳도 있고요.
마찬가지로 만화에 있어서는, 왜 일본은 감히 시도도 못 해보다가 이제야
한발짝 들어서려는 대여점 제도나 소위 '공장제' 일일만화를 무작정 비난만
하는지도 이해 못하겠습니다.
이제 대여점 체제를 시작하려는 일본은 지금 우리를 벤치 마킹하고 있습니
다. 한국에서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최대한 자신들에게 맞는 만화 대여 체
제를 만들려는 것이죠.
현재의 대여점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그 부분만 개선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일일만화라는 장르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일본과는 다른 우리 만화
만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일일만화 시스템 그 자체
가 비난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일일만화 체제는 시스템상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제작사와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잡지 체제로 이미 폐색된 일본의 만화 시장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와 상황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동
일한 결과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장 애니메이션은 일본에서도 이
젠 연이은 실패로, 스튜디오 지부리를 제외한 그 어떤 제작사에서도 오리
지널 극장판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TV판이나 기타 시리즈물의 극장화만 있을 뿐이죠. 반대로 TV 애니메
이션 쪽은 사상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촛불이 마지막에 타오르는' 것으로 표현하며, 일본 애니
메이션계의 암울한 그림자를 예고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여러 스튜디오의 파산 위기 등, 여러 위험 요소가 많다고 합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세계에서도 창작하고 있는 국가가 매우 적은 문화
장르입니다. 따라서 그 시스템에 '정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일본의 현행 만화 or 애니메이션 시스템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겨
우 단 50년 정도만에 구축된 것입니다.
(전전과는 달라진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의 현 시스템을 정답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물며 아무리
보아도 현재 일본의 만화 or 애니메이션 업계가 지속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
다고는 보기 힘듭니다. 스스로도 불황이라고들 하니까요.
그 불황의 원인도 파악하지 않은 채, 뒤늦게 이제 와서 일본의 예를 그대
로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은 위험천만하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한국은 여러 가지로 일본에 비해 유리한 점이 많다고 봅니다. 애
니메이션에 있어서 전통적인 극장, TV, OVA 외에 특별한 대안을 찾지 못
하며, 기껏해야 고전적 제작 방식을 단지 '1인 제작'으로도 바꿀 수 있다
는 점만을 증명한 신카이 마코토에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허약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일본 애니메이션계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마시마로』의 성공 이후, 벌써 예전부터 '개인 애니메
이션'의 가능성이 높게 점쳐져 왔습니다. 지금은 많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
기도 하고요. 물론 단순히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술로만 따지자면
지금의 일본도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만화에 있어서도, 50년 동안 지속해온 주간 만화지 과점 체제와 잡지를 중
심으로 한 단행본 시장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일본에 비해, 일본식의 잡지
체제부터 판매용 단행본, 대여점, 대본소, 신문 연재 만화, 웹 만화 등
온갖 실험을 다 해본 한국 시장의 유연성이 훨씬 더 클 것은 자명한 사실입
니다.
분명히 우리는 1990년대까지 일본을 벤치 마킹하는 데에 급급했습니다. 하
지만 일본 만화계는 2000년대부터 외부에 대한 벤치 마킹을 늘리고 있으며,
그 중에는 분명히 한국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자신감을 가질 만큼의 무언가를 생성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만, 적어도 일본만을 무작정 따라 하면 되는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고 저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남을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 시장에 어떤 시스템이 가장 알맞을지
스스로 생각해야 할 시기입니다.
모방에 비해 창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만, 마치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만화 (및 도서)에 대한 대여권'이 우리나라에서 먼저 도입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듯이, 이젠 더 이상 우리가 모방할 대상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따라만 하면 되었던 시기를 벗어나, 이제 만화를 비롯한 한국
의 문화계는, '유년기의 끝'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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