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타카구치 사토스미 『롱타이 BABY』. 관련자료:없음 [26318]
보낸이:선정우 (mirugi ) 2003-06-28 19:03 조회:250
타카구치 사토스미[高口里純].
이름부터가 뭔가 멋진 느낌이 드는 일본의 여성 작가.
소위 '양키물'이라 불리는, 학생 깡패? 불량배? ……들의 만화는 많지만,
여깡패 (스케반?) 들의 세계를 멋지게 그려내는 작가는 사실 많지 않다.
그것도 양키물은 폭력성을 띠거나 개그물이 되기 쉽고, 간간히 우정이라든
가 청춘이라든가 그런 쪽으로 빠지는 작품이 있을 뿐인데, 불량한 여학생
들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내는 작품은 사실 많지 않다.
본래 나는 타카구치 사토스미의 작품을, 그녀의 야오이 계열 작품들 (혹은
동인지)로 먼저 접했다. 타카구치 사토스미가 그려내는 『은하영웅전설』
의 야오이적 세계관이 마음에 들었다. 『행운남자』 등으로 대변되는 그녀
의 야오이 계열 상업작품들 역시 재미있었다.
하지만 역시 타카구치 사토스미의 본령은 『꽃의 아스카조!』로 대표되는,
'강한 여성상' '여학생들의 리얼한 세계'가 아닐까 싶다.
오늘은 최근 읽기 시작한 그녀의 장편만화 『롱타이 BABY』에 대해 잠깐 써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롱타이', 일본의 불량한 여학생들이 주로 입는 '롱 타이트 스커트'의 약
자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의 여학생들의 스커트는 길수록 불량한 것
이다. 짧은 미니스커트는 모범생의 증표다.
그래서 일본의 불량한 여학생들은 스커트를 길게 개조해서 입는다. (한국
의 여학생들은 짧게 개조하지 않던가? ;;) 스커트는 길게 늘리고, 웃도리
는 짧게 해서 팔을 약간만 들어올려도 배가 나올 정도로 하는 것이 불량 여
학생의 패션이다. (왜 위는 줄이고 아래는 늘리는지는 나도 모르고, 본인
들도 모르는 듯 하다. 『롱타이 BABY』 본문 중에도 그에 대한 의문을 캐
릭터가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머리를 염색하거나 파마를 하는 것은 한·일 공통인 듯 하고, 가방을 얇게
개조하는 (그러면서 무기로 쓸 수 있도록 쇠로 주변을 강화시킨다) 것은 일
본에서 매우 일반적인 스케반의 증표다.
어느 여자 상고의 2학년 명물 컴비, 통칭 챠코=만넨 히사코[万年久子]와
통칭 마코=하치야 마유코[蜂屋間由子]가 벌이는, 조금은 위험한(?) 학원
라이프+여깡패들의 실상이 『롱타이 BABY』의 주요 내용이다.
1987년 코단샤 「Fortnightly mimi」에서 연재를 개시, 단행본 8권 거의
끝 부분까지 1부, 그 뒤부터 단행본 11권까지 2부, 그리고 12권부터 3부
가 시작되었으나 15권에서 갑자기 mimi 코믹스로는 발매가 중단되었던 이
작품.
최근에 나온 문고판 전 8권도 단행본 15권까지의 내용 그대로이고, 1997년
카도카와쇼텐 「영 로제」에 3회 연재된 외전 격의 작품이 『론타이 BABY
플레이백』이란 제목의 문고판 전 1권으로 따로 나와 있다.
1985년 연재 개시되어 타카구치 사토스미를 일약 대히트 작가로 브레이크시
켰던 걸작 『꽃의 아스카조!』와 함께, 그녀를 '양키 작가'로 인식시키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된 작품이 바로 이 『롱타이 BABY』다.
일본의 환락가 카부키쵸를 배경으로 외톨이 늑대처럼 살아가는 14세 소녀를
그리며, 그 와중에 조직과의 대결과 같은 처절한 액션과 함께, 이지메 문
제와 등교 거부 등 일본 학교 사회의 문제를 고발했던 『꽃의 아스카조!』
와는 조금 노선이 다르지만, 『롱타이 BABY』 역시 1974년의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옛날 좋았던 그 시절'의 불량 여학생들의 실제 모습을 확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타카구치 사토스미가 양키물 전문 작가는 물론 아니다.
양대 장편 만화가 양키물이고, 또 『꽃의 아스카조!』가 드라마화도 되고
워낙 그녀의 이름을 띄운 작품이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들 뿐, 타카구치 사
토스미는 본래 대단한 다작 작가로서 별의 별 작품이 다 있다.
그 중에서 물론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소년은 젖기 쉽고 사랑은
이루기 어렵다』와 같은, 여교사와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간의 육체관계를
다룬 '연상녀-연하남' 사이의 육체적 사랑을 그린 작품이나, 『EX-MEN 들
어줘』와 같은 초미남을 그린 작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목 그대로 아름
다운 남자들이 나오는 『아름다운 남자』와 같은 작품들이다.
(………… …………)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래 나는 항상 밝히고 있지만, 철이 든 이후, 정확히 말해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만화에서든 애니메이션에서든 여성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
던 적이 전혀 없었다.
캐릭터로서의 묘사라든가 성격 표현, 뭐 그런 것이 괜찮다 싶은 여성 캐릭
터야 물론 간혹 있어왔지만, 누군가가 "좋아하는 캐릭터는?"이라고 물어본
다면 오직 남성 캐릭터들만, 그것도 거의 소년들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런 와중에, 간혹 굉장히 마음에 드는 여성 캐릭터들이 있다.
철들기 전에 처음 보았던 여성 캐릭터로서는 유일하게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이라든가도 있지만, 뭐 이쪽도
근래에는 '마음에 드는 캐릭터'로서 말하기만 하고 있을 뿐 아무래도 워낙
오래 지나서 감흥이 많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철이 든 이후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여성 캐릭터는, 1991년 7월 14일부
터 NHK BS2에서 방송되었던 이케다 리요코 원작 『오빠에게……』 애니메이
션 판에 나오는 생 쥬스트님과 미야[宮]사마였다.
그 외에는, 『롱타이 BABY』와 비슷하게 뭔가 깡패tic한(?) 두 여학생 컴
비가 등장하는, 시토 료코[市東亮子]의 만화 『야지키타 학원 도중기[やじ
きた學園道中記]』의 주인공, 야지마 쥰코와 시노키타 레이코 정도랄까.
뭔가 강한 힘을 지닌, 남성상을 따라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페미니즘
적이기도 하고, 뭔가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 캐릭터를 마음에 들어 했
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생 쥬스트'님'에 대한 감정에서 특히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생
각되지만, 내가 이 여성 캐릭터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소년 캐릭
터들에 대한 '좋아한다'와는 조금 달랐다.
소년 캐릭터들은 그냥 순수하게 말 그대로 '좋아한다'였지만, 이런 여성
캐릭터들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경한다'랄까? 아니 내가 그 여성 캐릭터
들처럼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그녀들을 부러워하여 동경한다거나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은 아니고, 마치 스타를 보는 팬의 시선이라면 좀 더 정
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마치 『오빠에게……』에서 장미꽃을 입에 물고 피아노를 치는 (…………)
생 쥬스트'님'에게 여학생들이 환호성을 보내는, 그런 느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야지키타 학원 도중기』를 처음 봤을 때에도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오
늘 결정적으로 『롱타이 BABY』를, 산지 반년 이상 지나서 간신히 읽을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_-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사실, 타카구치 사토스미 만화는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왠지 손
에 잘 안 잡히는 특성이 있다. 내가 읽었던 이전까지의 모든 타카구치 만
화가 전부 그랬다. 전권을 일단 사놓고, 두세 달은 기본이고 1년 가까이
나 지나서야 간신히 읽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이 『롱타이
BABY』도 그런 경우. 그나마 반년 좀 넘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상당히
빠른 편.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롱타이 BABY』4권 말미, 연재 30회째부터 두 주인공의 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이타쿠라[板倉]라는 아가씨가 있다.
오미 여자고등학교, 통칭 '미녀고'라 불리는, 못생긴 여자들은 감히 입학
조차 못한다는 미녀들만의 여고. 새로 생긴 전철 역 때문에 주인공들의 학
교와 최근 알력이 생기기 시작한 그 오미 여고의 TOP 중의 한 명인 이 아가
씨는, 첫 등장부터 꽤나 예쁘게 생긴 얼굴에 온통 반창고, 그것도 오른쪽
눈 전체를 가린 반창고가 특징적인, 위험한 모습으로 작중에서 데뷔했다.
그때부터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들 것 같은
캐릭터를 (주로 소년에 대해서) 엄청나게 빨리 캐치한다.
그것은 마치, 제목만 보거나 그냥 지나치다가 흘끗 본 것만으로 '분명히
재미있을 것이 틀림없는 만화'를 찾아내는 능력과 함께, 나 스스로도 굉장
히 놀라워하고 있는 능력(?)이다.
처음 본 그 순간에는 아직 마음에 안 드는 상태 (나중에 다시 보면 거의 매
번, 처음 등장한 장면은 나중보다 덜 매력적이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앞으로 얘를 분명히 좋아하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타쿠라라는 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첫 등장은 그림체부터가 사실 그다
지 내 취향이 아니었다. 6, 7권쯤 가서 등장하는 이타쿠라에 비하면 확실
히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왠지 눈길이 끌렸다.
그리고, 연재 분량의 거의 첫 페이지부터 등장했던 것과는 달리, 한참 동
안을 스토리 전개와 별 상관없이 서있기만 하던 -_- 이타쿠라가, 처음으로
주인공들과 대결하던 장면!
……그 장면에서 나는 바로 이타쿠라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무기는, 한손에 든 면도날 2개!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 2개를 끼우고 공격하는 이유가 뭘까? 칼로 베인 '자
상'은, 하나로만 베인 곳을 꿰매고 치료하면 쉽게 아무는 편이다. 하지만
베인 상처 바로 옆에 또 베인 상처가 생기면, 꿰매기도 쉽지 않고 치료가
매우 힘들어진다고 한다.
특히 면도날과 같은 예리한 날이, 겨우 손가락 1개 분량의 거리에서 베이
게 되면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야쿠자도 아닌 여학생이 무슨 엄청난 총도
법 위반의 일본도를 들고 다닐 수도 없을테니, 이왕 면도날 정도로 싸우려
고 한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 '기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그것 뿐이다.
외모나 성격도 뭐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예쁘장하게
생겼으나 실은 깡패, 면도날 2개를 한손에 들고 공격하는 것이 특기'라는
사실만으로 마음에 들어버렸다. ;;
만화에도 항상 나오는 대사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근데 나는 항상, 작품에 대해서든 캐릭터에 대해서는, 특별히 좋아
하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면 이 말을 갖다 붙이곤 한다. -_-)
…………아무튼간에.
『꽃의 아스카조!』나 타카구치 사토스미의 다른 만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
면, 『롱타이 BABY』도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특히나 국내에도 얼마 전 번역 출간된 『야지키타 학원 도중기』를 좋아하
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 작품은 『막강콤비 학원기행』인가 하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참고로 시토 료코도 꽤 재미있는 작품을 그리는 작가다.
저 『야지키타 학원 도중기』는 물론, 『BUD BOY』도 일독해볼 만은 하다
고 생각한다.
……하여튼, 갑자기 중간에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롱타이 BABY』는
재미있는 만화고,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여성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
었으며, 타카구치 사토스미 만화는 웬만하면 다 재미있는 것으로 보아 상
당히 나랑은 코드가 맞는 작가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뭔가 간단한 얘길 하기 위해 엄청나게 길게 써버린 듯 한……. 항상 그렇
긴 하지만. -_-)
아, 한 가지 더.
내 마음에 드는 만화 속의 여성 캐릭터란, 대부분의 경우 소년 캐릭터와는
달리 '멋있군!'이라는 느낌이 드는 경우였다는 것. 예전부터 느끼고는 있
었던 것인데,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여성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할 경우, 그 캐릭터를 애인처럼, 혹은 부인처
럼(?), 누나처럼, 여동생처럼, 딸처럼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텐데,
나의 경우에는 뭔가 후배 여학생이 선배 여학생이나 동급생 중에서 멋진 애
한테 느끼는 감정과도 비슷한 (……레즈?) 그 무엇인가에 가깝다고 할까.
하여튼 멋진 여성 캐릭터는 그나마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 예쁘기만 하거
나 귀여운 척 하는 여자 캐릭터를 싫어하는 남성도 꽤 많지만, 나의 경우
에는 그런 것도 아니고……. 보통은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_-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美少年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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